뙤약볕이 쏟아지는 여름에는 모두 기후 변화를 근심하며 한마디씩 하지만,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어쩐지 관심의 주변부로 밀려나는 것만 같다. 유난히 따뜻했던 가을을 지나 천천히 겨울로 향해 가는 지금, 자꾸만 뜨거워져 가는 우리의 지구에서 앞으로 살아가야 할 아이들을 생각하며 이 책에 관해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다. 멸망 속에서 가장 곡진한 사랑을 펼쳐 보이는 청예의 장편소설 『일억 번째 여름』이다.
“자연에는 악의가 없다. 그래서 선의도 없다. 그들은 사람을 살리거나 죽이기 위해 몸을 흔드는 게 아니다. 그저 흔들리니 흔들 뿐이다.” (47쪽)
반복되는 폭염 속에 여름만이 존재하는 세계, 절멸 직전의 인류는 두 종족으로 나뉘어 대립한다. 이들이 공통으로 믿고 있는 예언은 ‘어두운 꽃이 푸르러지는 일억 번째 여름이 시작되면 한 종족은 반드시 멸망한다’는 것. 통제된 성채에서 찬 공기를 유지하고 지내는 두두족과 여름을 온몸으로 맞아가며 생존 중인 미미족 사이에는 미움과 살기가 흐른다. 두두족은 높은 기술력을 독점한 채 바깥에서 땀내 풍기며 살아가는 미미족을 천시하고, 인공적으로 지진이나 뇌우와 같은 재해를 만들어내 이 에너지를 미미족에게 채집하여 바치도록 위험한 노동을 외주화한다.
그리고 이 세계에는 양쪽 집단을 걸치고 있는 혼혈 이복형제가 있다. 미미족의 유전자에 새겨진 고대어 해석 능력을 얻기 위해 두두족 족장이 일부러 미미족 여성과 교제하여 얻은 아들들. 첫째 아들인 일록은 좋은 신체 조건은 갖추었지만 고대어를 읽지 못했고, 다른 어머니에게서 난 이록은 고대어를 읽을 수 있지만 대신 걸을 수 없는 다리를 가졌다. 일록은 아버지를 따라 두두족 거주구 ‘하얀성’으로 떠났지만, 이록은 미미족 지역에 남는다.
“나는 언제나 그 아이를 지키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에겐 미안하지만, 내게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187쪽)
두 종족 간 착취의 고리가 선명할수록, 두 형제의 갈등이 극화될수록, 이 상반된 세계가 서로에게 섞여드는 방식이 흥미롭다. 모든 것은 반듯하게 잘라질 수 없고, 완벽하게 적대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마음들이 있었다. 이록은 자신을 늘 업고 고대의 에너지를 탐색해 온 주홍을, 일록은 자신의 쓸모를 회의하던 어린 날에 늘 힘이 되어주었던 연두를 각기 다른 사랑법으로 보호한다. 그것이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되더라도, 이 멸망 속에서 부디 당신만은 살아남기만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소설가 청예는 이 책에 관해 “사랑이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하여 기꺼이 온 삶을 던지는 세계로 오세요”라고 썼다. 이렇게 절박한 마음이 가득한 사랑은 얼마 만인가, 놀라운 마음으로 자꾸만 넘어가는 책장을 아까워하며 읽었다.
『오렌지와 빵칼』의 강렬하고 뾰족한 감각을 경험한 독자와 이 책의 깊고 섬세한 사랑을 읽은 독자는 청예 소설 스타일에 대해 전혀 다른 기억을 갖지 않을까. 산뜻한 상상력으로 우리를 사로잡았던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작 『라스트 젤리 샷』은 또 어떠한가. 이렇게 항상 다른 시도를 감행하며 이야기의 매혹으로 우리를 끌어들이는 작가가 또 있을까 싶다. 한국 SF의 떠오르는 신예, 소설가 청예가 선보일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고 기대되는 이유다.
최지인 문학 편집자•래빗홀 팀장
– 출처 :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510200018i